서구 심장에 꽂은 변방의 목소리… 누구를 위한 미술인지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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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중부 헤센주의 소도시 카셀에서 5년마다 열리는 카셀 도쿠멘타는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를 능가하는 세계적인 미술 제전이다. 1955년 미술기획자 아르놀트 보데가 주도로 모더니즘 추상미술을 퇴폐 예술로 몰아 탄압한 나치 정권의 만행을 성찰하자는 취지로 출범했다. 이후 2017년까지 14차례 지속되면서 동시대 미술의 최전선을 보여주는 중요 행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난 6월 18일(현지시간) 개막해 이달 25일까지 100일간 열리는 카셀 도쿠멘타 현장을 최근 다녀왔다.

올해는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권에서 총감독이 탄생해 진작부터 화제가 됐다. 그것도 개인이 아닌 인도네시아 작가그룹 '루앙루파(현지어로 아트 스페이스라는 뜻)'가 총감독을 맡았다. 14명의 작가로 구성된 루앙루파는 2002년과 2018년 광주비엔날레에도 참여한 적 있는데, 이번 주제로 '룸붕'(Lumbung)을 내걸었다. 인도네시아 말로 '나눔의 곳간'이란 뜻으로, 전통 농경사회에서 잉여 농산물을 공유·축적하는 장소다. 루앙루파는 룸붕이 하나의 주제라기보다는 지식과 개념, 프로그램, 돈 등을 나누는 협력적인 구조를 구축하는 실천임을 강조했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보여주기보다 기존의 관행에 질문을 던지며 균열을 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올해 베니스비엔날레를 능가했다.

#질문 1. 누구를 위한 미술이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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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셀 도쿠멘타 메인 전시장인 프리데리치아눔미술관 앞 광장 풍경은 너무 평범해 오히려 충격적이었다. 거대한 미술 이벤트임을 나타내는 어떤 표식도 없었다. 2017년의 14회 행사 때 각지에서 모은 금서를 쌓아올려 그리스 신전처럼 세운 설치미술이 광장을 점령한 스펙터클한 장면과 대조됐다. 대신 미술관 정면 기둥을 칠판삼아 낙서한 문자와 드로잉이 이번 행사의 성격을 드러냈다.

‘중산층은 꿈도 중간 크기다(Middle Class have Middle Dream)’ ‘인상주의 입체주의 표현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투어리즘’ ‘곤경에 빠진 사람들(People in Need)’ ‘국제적, 로컬적’.

기둥에 휘갈긴 글씨는 이번 전시가 상업주의와 빈부격차, 글로벌리즘에 대해 성찰하자고 제안하는 선언서로 읽혔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면 더 놀라게 된다. 아이들 그림이 학예회 풍경처럼 걸려 있을 뿐 아니라 재활용품을 활용한 놀이터가 보란 듯이 차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번 행사 기간 동안 프리데리치아눔미술관은 미술관이 아니라 ‘아늑한 집’으로 바뀐다는 기획자들의 의도를 알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참여 작가들은 전시만 하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 요리도 하고 잠도 자고 관객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맥주 상자, 폐목재 등으로 만든 의자와 마루는 쉼터가 된다. 영상조차 바닥에 누워 볼 수 있도록 거대한 우산 모양 지붕에 매달려 있는 작품도 있다.

인근의 또 다른 전시 장소인 도쿠멘타홀에는 아예 스케이트보드장을 차렸다. 관람객이 보드를 즐기는 바닥에는 낙서가 가득하다. 극장 간판 화가까지 참여한 사방 벽화에는 식량문제, 전쟁, 기근, 양극화 등을 주제로 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질문 2. 왜 항상 서구미술만?… 서구 현대 미술 심장에서 솟구치는 변방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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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歐美)에 대한 아시아와 중동·아프리카, 남성에 대한 여성 등 약자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많다. 프리데리치아눔미술관 2층 마이고자타 미르가타스가 ‘누비 회화’로 표현한 ‘탈이집트’ 연작이 그렇다. 44세의 이 폴란드 여성작가는 성서 속 남성 중심 서사를 여성 중심으로 전복시킨다. 또 다른 홀에서는 쿠르드 자치지역 출신 영상 제작 집단 ‘로자바 필름 코뮨’이 제작한 중동의 풍경과 문화를 소재로 한 영상을 보여주는데, 터번을 쓴 노인이 부르는 현지 노래가 심금을 울린다. 바닥에 깐 붉은 양탄자에 발을 뻗고 관람할 수 있게 하는 등 도처에 쉴 곳이 많아 관람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카셀로는 부족해 그리스 아테네에 제2의 전시장을 차렸던 2017년 카셀 도쿠멘타의 과시적 물량공세가 이번에는 없었다는 점도 ‘느슨한 관람’을 돕는 요소다.

프리데리치아눔미술관 인근 오토네움자연사박물관에는 이번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초대 받은 작가그룹 이끼바위쿠르르의 영상을 볼 수 있다. 이 작품도 변방의 목소리를 낸다. 제주 하도 해녀합창단의 ‘제주아리랑’ 노래를 담은 ‘해초 이야기’와 제주도와 미크로네시아의 섬들, 인도네시아를 오가며 태평양전쟁의 흔적을 담은 2채널 영상과 25점의 사진 작업으로 구성된 ‘열대 이야기’을 선보인다.

아시아 출신이 처음 총감독에 선정됐다고 하지만 서구 현대 미술의 심장부인 카셀 시내에 산재한 행사장 곳곳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의 목소리가 이처럼 강하게 울려 퍼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질문 3. 추레하면 어떤가… 생태를 생각하는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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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거칠고 깨끗하지 않으며 고상하지도 않다. 액자 등 프레임 안에 들어간 유화나 아크릴 작품을 만나기는 힘들다. 장대함을 자랑하는 설치 작품도 없다. 회화나 사진 등이 프레임 없이 벽에 그냥 붙여져 있는 모습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압권은 과거의 오스트실내수영장을 리모델링한 이벤트 하우스에서의 전시인데, 인도네시아 반체제 작가그룹 타링 파디의 걸개그림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판 민중미술을 보는 듯 원색의 사용과 현실 참여적 주제가 두드러진다. 특히 야외 정원에 버려진 포장용 종이박스에 그린 종이 인형을 나무 막대로 고정시켜 설치한 설치 작품은 그 추레함이 오히려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팻말을 든 여성, 민중을 착취하는 돼지, 서로 총을 겨누는 해골 등 인권과 자유, 여성해방 등을 주제로 한 등신대 크기 종이 인형 수 백 개가 바닥에 꽂혀 있다. 비가 오면 젖어서 훼손될 수밖에 없어 상업성에 반기를 드는 태도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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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낳은 대표적인 작가 그림 형제를 기념하는 그림형제박물관에는 인도네시아 작가 아구스 누르 아말 픔토의 작품들이 나왔는데, 일상 플라스틱 용품들로 만든 설치 구조물이 갖는 유머가 한국의 주재환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카셀 외곽 성당에는 아이티 작가집단 ‘게토 비엔날레’가 해골로 분한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는 작품 등 신성모독으로 오독될 수 있는 여러 작품을 전시하고 있어 독일 가톨릭 사회의 관용성에 놀라게 된다.

유스호스텔을 사용한 전시장은 집시촌을 방불케 한다. 간이 천막이 여러 개 쳐져 있고, 내부는 중고 소파, 의자 등으로 채웠다. 그 안에서 즉흥적인 콘서트와 워크숍 등이 열린다. 완성된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술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누구를 위한 미술이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는 마당이기를 자처하며 기존 전시 틀을 깼다. 프리드리치아눔미술관 앞 화분 설치 작품에 내건 문구가 이번 카셀 도쿠멘타의 정신을 요약한다. ‘지금 질문이 생긴다. 예술은 어디에 있는가.’

카셀=글·사진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취재:  기자    기사입력 : 22-09-18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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