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휴일] 편의점은 잠들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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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 떠나고
아름다울 때 뛰어내리고 싶어도
나는 늦었네
턱수염 파릇한 녀석들이 침을 뱉네
욕도 침도 반짝이네
오토바이가 지나가네 고함을 지르며
벽 하나를 두고 사람이 죽고
발바닥 반대편 지구에도 사람이 떨어지지 않고 걸어 다닌다네
아무렇지 않게 컵라면을 먹는 밤
캐럴은 흘러나오고
열여덟 살에겐 술을 팔지 않는다는 가게를 지나
눈이 내리네
내리는 눈에서 술맛이 나도
한밤이네 아직은, 거리도 골목도
하얗게 늙어가네
sleep on the floor를 두 시간째 듣고 있네
물을 잔뜩 실은 소방차와
안이 텅 빈 응급차가 지나가도
눈이 내리네
sleep on the floor를 세 시간째 듣고 있네
오늘을 잘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사랑할 때 떠나고
아름다울 때 뛰어내리고 싶어도
sleep on the floor를 네 시간째 듣고 있네

조혜경 시집 ‘그 오렌지만이 유일한 빛이었네’ 중

아름다운 시. 읽는 즐거움이 가득한 시. 눈과 음악과 밤을 배경으로 시어들이 춤을 추는 듯하다. ‘나는 늦었네’ ‘눈이 내리네’ ‘하얗게 늙어가네’ ‘듣고 있네’가 노랫말처럼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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