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공평하지 않은 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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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전 세계에서 사람이 죽는다. 외신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유명 인사의 부고 기사가 실린다. 솔직히 부고의 모든 인물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지난 12일(현지시간) 사진가이자 영화 제작자인 윌리엄 클라인이 96세로 별세했을 때 편집국에서는 기사화 여부를 놓고 작은 갑론을박이 있었다. 영미의 주요 언론이 부고 기사를 실었지만 주변에서 그의 이름을 들어봤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외신은 그를 ‘현대 사진의 개척자’로 불렀다. 뉴욕, 로마, 도쿄와 같은 도시 생활의 에너지를 꿈꾸는 듯한 이미지로 보여줬다고 하지만 낯선 인물이어서 애도의 마음이 쉽게 생기지 않았다.

최근 부고 기사를 보며 ‘100세 시대’가 됐음을 느낀다. 클라인을 비롯해 이달 세상을 떠난 유명인 상당수가 90대다. 지난 13일 숨진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는 91세로 사망했다. 그는 더 살 수 있었지만 연명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조력자살을 택했다. 그리스를 대표하는 국제적 여배우 이렌느 파파스도 14일 96세 나이로 별세했다. 재즈피아노의 전설이라는 미국인 램지 루이스도 12일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달 부고 기사가 난 유명인 중 가장 나이가 적은 사람은 지난 11일 사망한 스페인의 문학 거장 하비에르 마리아스로, 70세였다.

9월의 부고 기사는 지나온 20세기가 문화예술적으로 얼마나 찬란했는지 되돌아보게 해준다. 고다르는 1960년대 영화사에 혁신적 변화를 몰고 온 ‘누벨바그’ 운동을 이끌었다. 그 덕택에 우리는 작가주의를 표방하는 감독들의 독창적 작품을 즐길 수 있었다. 또 그 덕에 화면이 흔들리는 ‘핸드헬드’ 촬영과 롱테이크 촬영 등 낯선 방식의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된 스페인 소설가 마리아스의 작품은 국내에선 익숙하지 않지만 46개 언어로 번역돼 56개 국가에서 900만부가량이 팔렸다고 한다. 성찰적 사유가 담겼다는 그의 소설은 많은 사람에게 인간과 삶에 관한 사색에 빠지는 시간을 제공했을 것이다. 60년 가까이 오리지널 재즈를 녹음하고 공연했다는 루이스의 음악도 전 세계 수많은 재즈 팬에게 즐거움과 위로를 선사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애도의 마음이 든 사람은 지난 2일 81세로 숨진, ‘노동의 배신’의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다. 그는 3년간 식당 종업원과 호텔 객실 청소부, 월마트 직원 등으로 일하며 저임금 노동자의 삶을 체험했고, 2001년 노동의 배신을 출간했다. 체험 르포가 얼마나 큰 울림을 주는지, 그 책을 통해 배웠다.

9월의 부고 기사 가운데 가장 많은 지면과 노력을 할애한 건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죽음이다. 지난 8일 서거 이후 19일 장례식까지 12일간 영미 언론은 압도적 분량의 여왕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한국 언론도 다르지 않았다. 생중계된 장례식은 수십억명이 지켜봤다.

동시대를 살았고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 고다르, 마리아스, 에런라이크에 비해 여왕의 죽음이 언론이 기울인 관심만큼 더 무게가 있는 일인지 의문이다. 추모는 고인이 생존했을 때 한 일을 기억하는 것인데, 70년 재위 기간 여왕이 한 일 가운데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앞서 언급한 다른 고인들은 삶을 풍부하게 해줬지만 여왕이 내게 어떤 삶의 효용을 줬는지 알기 어렵다.

민주주의 시대 군주로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일 수 있다. 영국인에게는 그의 존재 자체가 긍지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대의 ‘거장’ ‘전설’과 비교했을 때 스스로 힘으로 이룬 게 얼마나 있는지 냉정히 보는 시각도 필요하다. 여왕의 일대기를 쓴 기사엔 ‘권위의 상징’ ‘역사의 산증인’ 이상의 제목을 붙이기 어려웠다.

권기석 국제부장 keys@kmib.co.kr




취재:  기자    기사입력 : 22-09-22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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