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진보의 재구성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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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정부는 지난 5년 동안 한국 진보 세력의 정치적 자산을 너무 쉽게 탕진했다. 더불어민주당은 2017년 대선 이후 모든 선거에서 연전연승하며 보수 정권 탄핵의 반사이익을 마음껏 누렸다. 2020년 총선에서 진보 세력은 민주당과 그 위성정당, 정의당 등을 포함해 190석에 이르는 의석을 확보하며 진보 정치사에 남을 압도적 다수파를 형성했다. 다수파는 됐지만 과정은 정의롭지 않았다. 집권 세력은 국민의당이나 정의당과의 연동형 비례대표제 합의를 배신하면서까지 총선 승리에 목을 맸다. 그 이후 진보 정치는 연전연패다. 당헌까지 바꿔가며 참여했던 지난해 서울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큰 망신을 당했고 5년 만에 정권을 잃었다. 지난 6월 지방선거 패배는 보나마나였다. 지금 정의당은 창당 후 최대 위기를 맞았고, 민주당은 의회 권력을 방패 삼아 사정의 칼날을 피하기 급급할 뿐 미래를 입에 올릴 겨를이 없다.

문재인 정권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도 진보 정권다운 제도 개혁이나 오래 기억할 업적 하나 없이 물러난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자 한국 정치의 불행이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의 선거 승리는 자신들의 ‘진보성’ 때문이 아니라 보수 정치 붕괴로 인한 어부지리였을 뿐이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정치적 기반을 넓히고 제도 개혁으로 진보 정치의 토대를 튼튼히 했어야 하지만 이들은 정반대의 길을 갔다. 승자 독식의 유혹에 빠져 586 중심의 갈라치기 정치에 더욱 빠져들었고 탄핵 연대를 구성했던 안철수와 유승민, 심상정의 소득주도성장 비판이나 정치 개혁 요구를 소수파들의 투정 정도로 치부했다. 그 결과 안철수와 유승민은 보수 연합으로 갔고 정의당은 당명을 바꾸고 재창당하기로 했다. 민주당은 새 지도부를 세웠지만 사법 리스크의 늪에 빠져 거대 야당의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다. 5년 만에 진보 정치는 붕괴 수준의 위기를 맞게 됐다.

진보의 전성시대 이후 펼쳐지는 검찰의 진격과 정치의 후퇴 현상은 아이러니하지만 진보 정치 실패의 생생한 증거이기도 하다. 근본 원인은 노무현의 죽음에서 시작한 문재인 정치의 한계 때문일 수 있다. 그는 노무현의 정신이 아니라 그의 죽음과 검찰 개혁에 집착함으로써 조국과 윤석열과 한동훈을 연이어 정치의 전면에 세우게 됐다. 노무현이 생각했던 진보는 ‘유러피언 드림’이었을 것이다. 그는 개방적인 통상국가를 지향하면서도 힘없는 보통 사람도 살기 좋은 나라, 복지와 연대로 공동체를 튼튼히 하는 유럽형의 국가 비전을 갖고 있었다. 이를 실현할 정치 연합과 타협의 정치를 상상했지만 그만한 정치 기반은 없었다.

탄핵 이후 문재인의 정치는 노무현이 가지 못한 진보의 길을 이어 갔어야 했다. 그가 하기에 따라서는 심상정과 안철수, 유승민까지도 유러피언 드림에 동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보를 위한 연합보다 적폐 청산을 명분으로 ‘보수 궤멸’과 20년 집권을 목표했다. 이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지적대로 그동안 보수 정권이 이룩한 역사적 성취나 1987년 민주 헌정 질서의 기초였던 보수와 진보의 타협을 부정하는 독단이었다. 촛불 정부를 자처하던 집권 세력은 자신들을 운동권 연합 정부로 인식하고 과거 정권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대화와 타협보다 대중 동원을 통한 압박과 굴복에 더 익숙했다.

진보 세력은 앞으로 문재인이 아니라 노무현의 정치를 발전적으로 계승해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야 한다. 눈앞의 승리에 목매는 진영 정치가 아니라 시장과 타협하는 합리적 진보 정치의 길로 가야 한다. 평등과 평화, 여성과 청년, 환경과 노동은 여전히 진보의 핵심 주제가 되겠지만 이에 대한 인식과 태도, 정책을 업그레이드하면 좋을 것이다. 소득주도성장이나 최저임금 1만원 같은 캠페인성 슬로건이 아니라 잠재성장률을 높이고 분배를 개선할 수 있는 제도 개혁 패키지를 마련해야 한다. 여성과 청년 고용을 위해 재정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성 평등과 공정 보상을 위한 진보적 노동시장 구조 개혁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소수파의 목소리를 공정하게 대변하도록 선거제도를 개혁하는 것이다. 단병호와 강기갑, 박지현과 이은주 같은 생활 현장의 지도자들이 좀 더 쉽게 제도 정치권에 진출할 수 있도록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 그래야 586 진보 정치의 독점도 깰 수 있다.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




취재:  기자    기사입력 : 22-09-22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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