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복지여왕 찾기’가 가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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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타낸 돈이 썩어나는구먼! 좀 갖다 버려도 되겠어!”

오일 쇼크로 인한 불황의 악령이 미국 사회를 배회하던 1985년, 사각의 링 위에 한 흑인 여성 프로레슬러가 올라 소리친다. 짙은 마스카라에 값비싼 펌 가발, 번쩍이는 모피 의상을 둘렀다. 정부가 발행한 무료식권을 링 위에 뿌려대는 그의 링네임은 ‘복지여왕(Welfare Queen)’. 넷플릭스 드라마 ‘GLOW(글로우)’ 속 레슬링쇼의 메인 악당이다.

드라마는 이 캐릭터로 불황 시기 만연하던, 또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편견과 혐오의 그림자를 신랄하게 비꼰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은 197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후보 시절 가상의 ‘흑인 복지여왕’을 내세워 복지제도를 향한 대중의 분노를 끌어냈다. 제도의 허점을 손쉽게 지적하려 동원한 선전 수단이었지만,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 흑색 정책 선전의 대명사로 남았다.

대중의 분노를 끌어내는 방법은 세계와 시대 공통이다. “국민이 잘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외국인 건강보험 문제를 해결하겠다.” 연초 대선 후보이던 윤석열 대통령이 내놨던 메시지다. 그는 피부양자 자격으로 국민건강보험급여 약 33억원을 받은 중국인의 예를 들었다. 해당 사례가 희귀병인 혈우병 환자라는 점, 직장가입자 1인당 평균 ‘숟가락 얹는’ 피부양자의 수는 내국인이 외려 외국인보다 3배 가까이 많다는 점은 언급하지 않았다.

‘복지여왕 찾기’는 최근 당국자의 입에서 부활했다. 이기일 보건복지부 2차관은 지난달 19일 대통령 업무보고 사전 회견에서 “외국인 피부양자가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 고가의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에 논란이 일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말 건강보험 재정개혁추진단 회의에서도 이 차관은 “지난해 외래 의료 이용을 연 500회 이상 한 사람은 528명이고 연 1000회 이상 한 사람은 17명, 연 2050회 이용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정작 가장 크게 돈 새는 구멍은 이번 정부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실제 근무하지 않는 의사를 ‘바지원장’으로 이름 걸고 다른 이가 운영하는 ‘사무장 병원’이다. 이들이 부정하게 훔쳐낸 건보 재정은 적발된 것만 누적 3조4377억여원이지만 환수한 건 6%를 겨우 넘는 2083억원이다. 코로나19 사태 직전인 2019년에는 적발액이 역대 최대인 7810억원으로, 일반적으로 추산하는 의료 과다 이용 규모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그간 단속 인력·권한 부족으로 놓친 사례, 단속이 어려웠던 지난 2년여간 숨어든 예를 고려하면 새어나간 금액의 실제 규모는 짐작조차 어렵다. 건보 재정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 건강에 피해를 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료 과다 이용, 즉 ‘복지여왕 찾기’보다 외려 시급한 문제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건보 종합계획 시행안 등 정부 문서에 언급되곤 하던 이 문제는 이 정부 들어 자취를 감췄다.

손쉽게 공공의 적을 설정하고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의료 과다 이용 문제와 달리 사무장 병원 문제는 다루기 까다롭다. 사실 정권 입장에서 건드리지 않는 게 편하다. 일반인들의 관심도 적을뿐더러 단속 강화에 의사들의 반발이 강해서다. 자신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 말라는 게 주된 논지다. 지난 정부에서 특별사법경찰 법안이 국회에 올랐지만 이 때문에 결국 보류됐다. 실태조사라도 확대하자는 법안이 최근 발의됐지만 역시 반발을 사고 있다.

복지 재정이 효율 높게 쓰이도록 제도를 다듬는 건 물론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지향점에 따라 재정 지출을 조절하는 것도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 과다 수급자의 예를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표적 삼는 것, 또 정작 재정 누수가 더 크고 국민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정치적 판단에 따라 건드리지 않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편의적으로 이끌어낸 대중의 분노에 기대기보다 진중한 정책적 반성과 해결책을 내놔야 한다.

조효석 사회부 기자 promene@kmib.co.kr




취재:  기자    기사입력 : 22-09-19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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