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마음을 담은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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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책 여섯 권을 선물 받았다. 작가 본인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 간 작품이라 술술 잘도 읽혔다. 두 번째 책의 페이지를 열었을 때 포스트잇 한 장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보낸 이가 남긴 쪽지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이 남긴 흔적이라 나는 그 글씨를 보고 상대방을 가늠했다. ‘휴먼 굴림체’ 같은데 글자마다 가볍게 흘려 있다. 띄어쓰기를 널찍하게 하는 모양새를 보니 맞춤법에 대해 꽤 자신감이 넘친다. 빠르게 쓴 쪽지 같은데 첫 문장을 쓴 펜과 두 번째 줄을 쓴 펜이 다르다. 그렇게 탐정 놀이에 몰두했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글씨체를 가지고 있다. 요즘이야 연필 잡을 일 없는 세대라서 하나 같이 악필이 됐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름 석 자 쓸 일은 종종 있다. 나는 어릴 때 부모님 사인을 몰래 베껴 성적표 하단에 쓰곤 했는데, 그렇다고 이분들의 글씨체를 그대로 쓰지는 못한다. 필적학은 골상학이나 다름없다고들 하지만, 낯익은 글씨체를 만나면 퍽 반가움을 느낀다. 그래서 나이 든 부모님이나 좋아하는 연예인의 손글씨를 모아 인공지능(AI) 기술에 학습시켜 폰트를 제작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런데 글씨체는 상황에 따라, 문맥에 따라 달리 쓰인다. 나의 배우자는 연애 시절 총 여섯 통의 편지를 썼는데, 그 시절의 글씨체와 결혼 3년 차에 쓴 반성문의 글씨체가 사뭇 다르다. 연애 때는 컴퓨터 화면에 내용을 모두 쓴 뒤 편지지에 가지런히 옮겨 적은 것이고, 함께 살며 쓴 것은 오만원권 두 장을 동봉하는 쓰라림이 깊이 밴 채 즉석에서 갈겨 쓴 것이다. 같은 사람이어도 상황에 따라 다른 자세와 속도로 펜을 놀린다. 문맥에 맞게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는 기술이 나오는 세상이니 언젠가는 부모님 글씨를 닮은 AI 폰트도 나를 다독이는 글을 쓸 때, 내게 조언하는 글을 쓸 때, 그 각각의 마음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어른이 된 나는 어릴 때와는 다른 이유로, 여전히 내 부모의 글씨를 탐하고 있다.

유재연 옐로우독 AI펠로우




취재:  기자    기사입력 : 22-09-16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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